제1대 제헌국회에서부터 제21대 선거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회의원 선거별 특징에 대하여 1부 ~ 4부로 나누어 알아보려 합니다. 오늘은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까지의 각 국회의원 선거별 특이사항, 임기, 의석수, 선거 배경, 선출, 선거 방식의 변화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 (1981년)
1981년 3월 25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대한민국 제5공화국 헌법에 의해 치러졌으며 투표율은 77.7%를 기록했습니다.
184석의 지역구와 92석의 전국구를 선출했으며 1선거구당 2석의 중선거구제였습니다.
정치활동 규제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정치인은 물론 구 민주공화당계 인사조차 대거 출마를 금지당한 상태에서 여당과 관제야당(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민주사회당, 민주농민당)만으로 치러진 선거였습니다.
게다가 전국구 배분 방식이 다수당에 극도로 유리하게 짜여졌는데, 지역구 의석에서 1위를 한 정당이 전국구 의석의 2/3를 독식한다는 황당한 조항이 생겼습니다.
또한 상술하였듯 기존 정치인들이 대거 정치활동이 규제되고 신군부에 영합하는 사람들이 대거 진출하면서 지역구와 전국구를 막론하고 초선의 비율이 매우 높았습니다.
이 선거부터 후보자 기호가 다시 추첨제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신군부에 의해 정치활동 규제를 당하지 않은 신민당 출신 정치인들이 민주한국당(유치송 총재)을, 민주공화당 출신 정치인들이 한국국민당을 차리게 되지만 국군보안사령부와 국가안전기획부가 창당 자금을 제공하고 공천자 명단, 당직 임명까지 관여하게 됩니다.
이후 신한민주당 창설 전까지는 북한과 다를 게 없는 사실상의 일당제로 굴러가게 됩니다.
- 11대 총선은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북한식 관제선거로써 한국 총선 중 최악의 흑역사로 꼽히고 있습니다.
북한 최고인민회의와 다를 게 없었던 관제선거의 악명에 묻혔지만, 그럼에도 본격적으로 컴퓨터를 활용한 개표방송이 시작되었다는 의의는 있습니다.
- KBS에서 1981년 총선을 앞두고 별개의 선거개표전산시스템을 갖춰서 이를 활용하여 개표방송을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1985년)
1985년 2월 12일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84.6%를 기록했습니다.
이 수치는 역대 총선 가운데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최고치를 기록한 것으로, 현재도 깨지 못하고 있으며 이후에 치러진 선거 가운데서 유일하게 1987년 치러진 13대 대선만이 넘어서게 됩니다.
의원 정수는 276명으로 11대 총선과 같았으며, 선거제도도 중선거구제였습니다.
184명의 지역구, 92명이 전국구였으며, 다수당에 유리한 선거법은 변화 없이 유지되어 지역구 의석에서 1위를 한 정당이 전국구 의석의 2/3를 독식하게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한국 선거 역사상 최대의 반전 드라마이기도 한데, 훗날 치러진 선거 중에도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등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온 사례가 종종 있었지만 무소불위의 독재 정권을 선거로 당혹스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12대 총선의 비중이나 여파는 더 극적이었습니다.
선거 결과는 그야말로 파란이었는데, 신민당은 전국 합산 29.3%의 지지율로 지역구 50석 + 전국구 17석을 얻어 총 67석으로 제1야당으로 등극하는 건 물론 서울 및 부산, 대구, 인천 등 대도시 지역에서 민정당과 호각을 다투는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특히 서울에서 민정당은 겨우 27.3%를 득표한 것에 그친 반면 신민당은 43.9%의 득표율을 올렸는데, 중선거구제라서 호각이었지 만약 소선거구제로 치러졌으면 대도시 지역의 의석수를 대거 신민당이 싹쓸이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한편, 민주정의당은 예상보다 적은 의석을 얻었으나 여당에게 지극히 유리하게 짜인 선거제도 탓에 과반은 유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관제야당인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은 제도상으로도 불리한 마당에 신한민주당에 밀리면서 제대로 유탄을 맞아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어 참패를 면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 민주정의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게 됩니다.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1988년)
1988년 4월 26일에 실시한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75.8%를 기록했습니다.
대한민국 제6공화국 수립 이후 치른, 즉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최초로 치러진 총선입니다.
국회의원의 임기가 4년인 만큼 원래대로라면 1989년에 치러졌어야 할 선거였지만 1987년 개정된 헌법에 따라 조기 실시하게 됩니다.
이후 9차 개헌의 영향으로 이후 치러진 국회의원 총선은 매번 하계 올림픽이 치러지는 해에 치르게 됩니다.
- 하지만 2020년 도쿄올림픽이 코로나의 영향으로 2021년에 개최하게 되면서 예외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총선부터 기호를 추첨제로 정하지 않고 원내 다수당 순서대로 상위 순번의 기호를 부여받도록 하게 됩니다.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12대 총선 때보다 23명이 늘어났으며, 지역구 의원수는 40명이 늘어났고 반대로 전국구 의원수는 17명이 줄어들게 됩니다.
선거제도도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전환되었으며, 다수당에 의도적으로 유리하게 만든 기존의 선거법은 다소 완화되어 지역구 의석수 1위 정당이 전국구의 1/2를 가져가게 됩니다.
- 이전까지 2/3에서 1/2로 감소된 것인데 14대 총선부터는 이러한 규정도 삭제되게 됩니다.
이 선거 역시 운동기간 중 전두환 정권과 같은 관권, 혼탁 선거가 펼쳐지면서 역시나 투명한 선거로 이어지지 못한 총선이었습니다.
- 대놓고 여당인 민정당 후보 선거유세장에 가면 국밥 같은 식사와 몇만 원씩 든 돈 봉투를 나눠줬고, 현역군인들의 부재자투표는 선거공보물만 받은 채 정작 표는 간부들이 모두 민정당 후보를 찍어서 보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한편 이 선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나와 부산직할시 동구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이후 청문회 스타가 되어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르는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또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 결별한 이후 정치인생에서 상기한 지역주의 구도를 타파하려 부단히 노력하였고, 지역분권 및 지방정부 자립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1992년 3월 24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13대 총선보다 3.9% p 감소한 71.9%를 기록하게 됩니다.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13대 총선과 같았지만, 지역구 의원이 13명 늘어나서 237명으로, 반대로 전국구 의원수는 13명이 줄어 62명으로 조정되었습니다.
이 선거에는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신정치개혁당, 민중당, 공명민주당이 참여했으며, 지금과는 달리 1인 1표 제로 전국구 의석은 각 정당의 지역구 의석비율을 기준으로 배분하게 됩니다.
이 선거의 영향으로 안 그래도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던 노태우 정권은 레임덕 현상이 가속화되었고, 사실상 선거판을 주도한 김영삼은 민정계 등 민자당 내 타 계파로부터 책임론에 시달리게 되었으며, 김대중은 97석의 야당대표로서 명예회복을 하며 대권 주자 자리를 확보하게 됩니다.
그리고 정주영은 일약 유력 제3후보로 떠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김영삼은 오히려 선거의 책임을 자신에게 비협조적이었던 노태우 정권과 민정계에 돌리면서 당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민자당 대권 후보에 무난히 선출되었고, 초원복집 사건 등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결국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유 있게 승리하며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14대 총선은 당시 강부자, 이순재, 이주일, 최불암 등 많은 연예인 출신 국회의원이 배출된 선거로도 유명합니다.
1992년에는 14대 총선과 14대 대선이 모두 있었는데, 만약 이때 국회의원 임기를 5년으로 늘리거나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줄였다면, 이후로도 계속 같은 해에 선거를 진행함으로써 대수 차이가 안 나게 할 수도 있었던 셈입니다.
14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흑백사진으로 선거벽보를 했고, 다음으로 치러진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부터 컬러사진으로 바뀌게 됩니다.
영화 대외비가 이 선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1996년 4월 11일 치러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지난 총선에 비해 8% p 줄어든 63.9%였습니다.
의원 정수는 299명으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와 같았으나 지역구 의석이 16석 늘어 253석으로, 전국구 의석이 16석 줄어 46석으로 감소했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1인 1 표제였으며, 비례대표 격인 전국구 의석은 지역구에서 각 정당이 득표한 수의 합산으로 결정했습니다.
13~14대 총선에서 전국구를 지역구에서 얻은 의석 수에 따라 배분하던 규정이 바뀐 것으로 지역구 의석수를 얻기 힘든 소수 정당에 조금은 유리한 쪽으로 선거법이 개정된 것입니다.
- 문제는 소수 정당의 희망인 전국구 의석을 대폭 줄였다는 것입니다.
1992년 14대 대선 낙선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에 있던 김대중 아태재단(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 이사장이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로 실력을 과시한 뒤, 그 해 7월에 정계복귀를 선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속했던 민주당 내부에서 그의 복귀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있자 아예 당을 나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이때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민주당 의원 중 2/3 정도가 새정치국민회의로 넘어가게 됩니다.
이 선거 이후 몇 년간 한국 정치판은 굵직굵직한 정계개편이 많게 됩니다.
-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초기까지
1990년 3당 합당 이후 199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주요 정당들의 이념, 정책적 포지션은 대강 자리 잡았는데, 정작 그 인적 구성원들은 이념과 정책적 지향이 아닌 인맥과 출신 지역에 따라 모여있었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 정치인들의 정당 이동은 꼭 부정적인 의미의 철새질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서식지를 찾아 이동하는 정계 개편, 즉 각자의 이념과 정책적 지향 따라 헤쳐 모여의 일환으로 볼 여지도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서 정말 양지 따라가는 철새 정치인들도 "저는 저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옮기는 것이 아니라 제 신념과 이념에 맞는 정당으로 옮기는 것뿐입니다"라고 변명하면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딱 잘라 그거 아니지 않냐고 논박하기는 힘든 분위기가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2000년대 초반 이후에는 이런 여러 차례의 정계 개편을 거친 끝에 각 정당 내부의 이념-정책적 통일성이 어느 정도 형성되었고, 따라서 당적 변경=자신이 지지하던 이념이나 정책을 버리고 노선을 바꾸는 행위라는 관념이 형성되게 됩니다.
환경이 이러니 정치인들도 당적을 바꾸는 데에 심리적인 제약이 덜한 게 어찌 보면 당연했는데, 특히 중도파 입장에서는 이 당이나 저 당이나 하는 거 보면 오십보백보인데 본인이 정말로 당에 충성심이 있지 않는 이상 굳이 귀찮게 야당 생활을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물론 이는 의원들의 사정이었고,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을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이후 '철새' 의원들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시민들에게 찍혀 이른바 낙선운동의 영향으로 상당수가 낙선의 운명을 맞게 됩니다.
그리고 낙선운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상당수 정치인들은, 2001년 통일부 장관 파동으로 DJP연합이 깨지자 살 길을 찾아 헤매다, 차기 대선 레이스에서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우세해 보이자 다시 원래 있던 정당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2000년)
2000년 4월 13일 치러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로 20세기 마지막 총선이며, 투표율은 57.2%로 역대 국회의원 선거 최저투표율 3위를 기록하게 됩니다.
- 1998년 제2회 전국동시지방선거 (52.7%)에 이어 연속으로 50%대 투표율이 나와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으로 실제 2000년대 치러진 일부 선거들은 투표율이 40%대까지 떨어지기도 하는 등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지만, 2010년대 이후부턴 다시 조금씩 회복하게 됩니다.
-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는 46.1%로 역대 최저투표율을 기록합니다.
지금과는 달리 1인 1 표제였으며, 비례대표 의석은 지역구에서 각 정당이 득표한 것의 합산으로 결정하게 됩니다.
법률에 따른 공식명칭은 '비례대표'였지만, 실상은 15대 총선에서의 전국구를 이름만 바꾼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 시기의 비례대표를 그냥 전국구로 칭하는 일도 잦은 편입니다.
- 1인 2 표제에 따른 비례대표제는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실시됩니다.
참고로 본 선거는 민주당계 정당이 여당으로 치른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이기도 합니다. 또한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2년 만에 치러졌다는 점에서 중간평가 격인 선거이기도 했습니다.
의원 정수는 273명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비해 26명이 줄었으며 비례(전국구) 의석 수를 동수로 유지한 채 지역구 의석 수만 26석 줄이게 됩니다.
현재, 제6공화국 역사상 의원 정수가 줄어들었던 유일한 경우인데, 이는 1997년 외환 위기 여파로 전 국가적으로 고통 분담을 하는데 국회 역시 몸집을 줄이고 불필요한 비용 지출을 막아야 한다는 논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16대 총선에서 1위와 2위 후보 간 표차가 1000표 미만이었던 지역구는 총 15곳이었으며, 특히 다른 총선과 비교해서 100여 표차 이내의 선거구가 유난히 많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20표 차 이내로 당락이 결정된 선거구가 무려 4개나 되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1표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보여준 초접전의 본좌급을 보여준 총선으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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