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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정보

이순신 장군 3대 해전 한산도대첩 명량해전 노량해전

by 로드킴 2024. 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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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3대 해전 순서는 일본 수군의 해전 금지를 이끌어 낸 세계 4대 해전 중 하나인 한산도대첩, 백의종군 후 12척밖에 남지 않은 조선수군의 사기를 끌어올린 명량해전, 철군하는 일본군을 끝까지 쫓아가서 완전 전멸을 목표로 대승을 거두게 되는 노량해전 순입니다. 

 

명량-해전
명량 해전

 

1. 한산도 대첩

한산도 대첩(閑山島大捷) 또는 견내량 대첩(見乃梁大捷)은 임진왜란 시기 이순신 장군의 승전 중 하나로, 한산도 내해에서 발발한 조선 수군과 일본 수군 간의 전투입니다.

- 전설의 학익진으로도 유명한 전투입니다. 

임진왜란의 전황이 바뀌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전투 중 하나로 일본 수군의 수륙병진을 완전히 박살 낸 대첩이며, 이 한산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평양까지 승승장구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이 추가 보급 및 병력 지원을 받지 못하여 평양성에 눌러앉게 되는 계가가 됩니다.

 

수군의 도움을 받지 못하니 전라도를 공격하는 왜군의 움직임도 둔화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한산도 대첩은 이순신장군의 3대 해전 중 하나로 세계 4대 해전과 임진왜란 3대 대첩에 속하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 해전입니다. 

 

- 세계 4대 해전 : 살라미스해전(기원전 480년), 칼레 해전(1588년), 한산도 대첩(1592년), 트라팔가 해전(1805년)

- 임진왜란 3대 대첩 : 한산도 대첩(1592년 8월), 행주대첩(권율장군 1593년 2월), 진주대첩(김시민장군 1593년 10월)

 

날짜 : 1592년 8월 14일

전장 : 통영시 한산도

장수 : 이순신, 원균, 이억기, 권준, 배흥립, 정운, 어영담, 김완, 이영남, 송희립, 황세득

병력 : 전선 56척

피해 : 3명 사망, 10명 부상

 

일본군 장수 :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사헤에 (전사), 와타나베 사치에몬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자살)

일본군 병력 : 군함 73척

일본군 피해 : 47척 침몰, 12척 나포

 

 

2. 명량 해전

조선 역사상 최고 최대의 조선 수군 승리 해전입니다.

 

칠천량의 패전의 손실이 커서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려고도 하였으나, 이순신은 선조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장계를 올려 수군폐지불가론을 펼치게 됩니다. 

 

-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전선 12척이 남아 있나이다. 죽을힘을 다하여 막아 싸운다면 능히 대적할 수 있사옵니다. 비록 전선의 수는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칠전량해전으로 대패한 조선 수군의 사기를 끌어올리는 최고의 전투였으며, 명량대첩 역시 일본군의 욕심에 의해 우리의 일자진이 제대로 통해 대승을 거둘 수 있게 되는 전투가 됩니다. 

 

<철사를 엮은 철쇄 사용>

1. 수중 철쇄(철사를 엮은 철 줄)는 지금 진도대교가 있는 폭이 가장 좁은 자리에 걸었으며, 양쪽에 막개를 박아놓고 쇠줄은 물속에 잠기게 숨겨놓은 뒤 일본 수군을 기다립니다.

 

2. 1597년 10월 26일(음력 9월 16일) 오전 11시경, 어란진에서 출발한 333척의 일본 수군은 우수영으로 흐르는 밀물을 타고 빠른 속도로 울돌목에 들어섭니다.

 

3. 그들이 울돌목에 들어서자 수중 철쇄에 걸려 차곡차곡 쌓이며 서로 부딪혀 여지없어 부서집니다.

 

4. 오후 1시경 밀물이 끝나고 물길이 멈춥니다.

 

5. 일본 수군은 좁은 수로에 갇혀 오도가지 못한 채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의 전선들이 전진하며 각종 화포를 빗발처럼 퍼붓습니다.

 

6. 다시 썰물이 되는 순간, 정지했던 물길이 거꾸로 바뀌어 왜수군 쪽으로 흐르게 되고, 유리하던 조류마저 불리하게 변하자 조선 수군이 떠내려가는 일본 수군을 완전히 섬멸하게 됩니다. 

이 쇠사슬은 당시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자신의 행적을 직접 기록한 《현무공실기》에 “철쇄(鐵鎖) 즉 쇠사슬과 철구(鐵鉤)로 적선을 깨뜨렸다.”란 기록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실제로 20세기 초 일본의 연구 문헌에 의해서도 '명량해전에서 10여 척만 도망했는데 실제로 당시 조선해군의 함포에 의해서 침몰한 함선보다 해류와 철쇄(철사를 엮은 철 줄)에 의해 파괴된 함선이 더 많았음이 확실하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날짜 : 1597년 10월 26일

전장 : 전라도 해남과 진도 사이 명량해협

장수 : 이순신, 배설 (탈영), 배흥립, 민정붕, 소계남, 송여종, 김응함, 조계종, 우수, 안위, 정응두, 김억추, 이응표, 류형

병력 : 전선 13척, 초탐선 32척, 어선 100척

피해 : 사상자 수 명, 정확한 규모 불명

 

일본군 장수 : 도도 다카토라(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가토 요시아키, 구키 요시타카, 하타 노부토키 (전사), 와키자카 야스하루, 간 미치나가, 간 마사카게 (전사), 모리 다카마사

일본군 병력 : 군함 133 ~ 330 여 척

일본군 피해 : 군함 31척 격침, 절반이상 궤멸, 거의 대파한 함선은 모두 320여 척

 

3. 노량 해전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이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전투입니다.

- '나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으로 전투보다 이 유언이 더욱 유명한 전투입니다. 

 

정유재란으로 조선을 재침략한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병사 소식을 듣고 철군을 진행하게 되고, 이때 이순신과 함께 싸우던 명나라 장수 진린은 일본의 뇌물을 받고 퇴로를 차단하지 말자고 하지만, 이순신은 진린을 끝내 설득하여 일본군을 공격하게 됩니다. 

 

 

날짜 : 1598년 12월 16일

전장 : 경상도 남해와 하동 사이 노량해협(오늘날 남해대교 자리)

장수 : 이순신 (사망), 진린, 등자룡 (사망), 이순신(입부), 김완, 이영남 (전사), 송희립, 배흥립, 우치적, 나대용

병력 : 조선 전선 83척, 명 호선 61척

피해 : 조선군 사상자 300여 명, 명군 사상자 500여 명

 

일본군 장수 :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 데라자와 히로타카, 다치바나 나오쓰구 일본군 병력 : 군함 500여 척

일본군 피해 : 200여 척 침몰, 100여 척 나포, 사망자 1만 명 내외

 

임진-왜란-해전-순서
이순신장군의 임진왜란 해전 순서 자세히 알아보기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

조선왕조실록에는 당시 장군이 "싸움이 한창 급하니 조심하여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바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의 죽음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그를 우의정에 추증했고, 1643년 인조는 '충무'의 시호를 내렸으며, 1793년 정조는 이순신 장군을 영의정으로 추증하게 됩니다. 

 

이순신장군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영국,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최고의 지략가, 장수라고 평가할 만큼 뛰어난 전략, 능력, 리더십, 카리스마를 가지고 계셨던 분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은 민족의 성웅인 충무공 이순신의 애국 위훈을 길이 전승하고, 민족자주정신을 선양할 목적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탄신일인 1545년 4월 28일을 기념해 제정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기념일 중 위인들의 생일에서 따온 두 기념일 중 하나입니다.

- 나머지 하나는 세종대왕의 생일인 스승의 날(5월 15일)이지만, 이 날은 세종대왕 탄신 기념행사도 벌이긴 하지만, 원래 기념일을 만든 취지가 '스승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날'임을 감안하면, 한국에서 순수하게 '한 위인 자체를 기념하는 날'은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이 유일한 셈입니다. 

2013년에 기존의 '충무공탄신일'에서 '충무공 이순신 탄신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이는 '충무공'이 개인의 명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시호이기 때문입니다.

- 조선시대에만 '충무'의 시호를 받은 사람이 무려 9명이며, 그중 같은 임진왜란 시기 활약한 진주목사 김시민도 같은 충무의 시호를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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