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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 윤봉길의사 그들은 누구인가?

by 로드킴 2023.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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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안중근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일본 메이지 시대의 정치가인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윤봉길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일본 경찰관료를 향해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져 같은 해 12월 19일 순국하게 됩니다. 

 

안중근-윤봉길
왼쪽: 안중근의사, 오른쪽 : 윤봉길의사

 

안중근의사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독립운동가로서, 1909년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으로 유명합니다.

 

안중근은 1909년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잘라 '끊을단, 손가락지'를 뜻하는 동의단지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살아생전 그는 남기는 글씨마다 잘린 네 번째 손가락을 자랑스럽게 찍어 남기게 됩니다. 


결성된 동의단지회는 일제에 항거하고, 그 끝에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에 공헌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 회담을 위해 참석한다는 소리를 듣고 하얼빈역에 잠입해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안중근의사의 사형선고일이 1910년 2월 14일이며, 3월 26일에 순국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만한 것은, 일본에서 처음 퍼진 발렌타인데이와 사형선고일이 겹쳤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 급격히 퍼진 발렌타인데이는 1960년대 일본 제과회사 모리나가사가 사제 발렌티노를 추모한다며 만든 일종의 이벤트 기념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본 모리나가 제과는 " 사랑하는 사람에게 발렌타인데이에는 초콜릿을 보내세요"라는 광고를 신문에 게재했고, 발렌타인데이는 연인들의 기념일이 돼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저나가게 돼버려, 우연인지 악연인지, 일부러 그랬는지는 몰라도 2월 14일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발렌타인데이로만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안중근의사의 어머니인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로도 유명한 데, 그 내용 다음과 같습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의사의 어머니 편지를 보면 왜 안중근의사가 독립운동가로서 굳은 심지를 갖게 되었는지 짐작할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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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

윤봉길의사는 안중근보다는 약 23년 뒤에 활동한 독립운동가로서,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활동을 돕다 결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고 순국하게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제 관료들 향해 물통 모양의 폭탄을 던진 후 자결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여 체포되었습니다.

 

- 도시락 폭탄으로도 많이 알고 있는데 실제 윤봉길의사는 도시락폭탄과, 물통 모양 폭탄 두 개를 준비해 가지고 기념식장에 갔으며, 두 개 모두를 터트릴 시간이 없어 물통 모양 폭탄을 터트린 후 남은 도시락폭탄을 터트리지는 못하고 그만 체포되게 됩니다. 

 

 

이 의거로 상하이 거류민단장 카와바타 테이지는 그 자리에서 직격으로 폭탄을 맞아 복부와 다리에 중상을 입어 창자가 끊어진 상태로 다음날 3시 10분에 사망하고,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육군 대장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중상을 입은 후 패혈증으로 인해 상태가 악화되어서 5월 26일에 죽게 됩니다.

 

주중 일본공사 시게미츠 마모루는 오른 다리를 잃었고, 상하이 총영사 무라이 쿠라마츠는 중상을 입었으며, 육군 제9사단장 육군 중장 우에다 켄키치 장군은 왼다리를 잃고 해군 제3함대 사령장관 해군 중장 노무라 기치사부로 제독은 우안을 잃어 애꾸눈이 되었습니다.

 

또한 주변에서 그들을 호위하던 일본군 병사들 몇십 명도 다치거나 목숨을 잃게 되었던, 실로 대단했던 폭탄 투척 사건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방점을 찍었고 1945년 대한민국의 독립에 하나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할 수 있게 됩니다.

 

오로지 윤봉길을 통해 한국이 독립하였다고 말하는 것은 비약에 불과하지만 윤봉길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독립은 꽤나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될 정도로 기억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윤봉길의사는 " 장부가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까지는 살아오지 않겠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기고 집을 떠난 후 1932년 12월 19일, 24세의 나이로 일제에 의해 총살당해 순국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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